눈도 달도 별도 아닌

 

 

김연주 (문화공간 양 큐레이터) 

 

 

 

 

검은 바탕에 흰 점이 가득한 작품을 보며 70개의 회색 달이 무수한 흰 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려진 것이 과연 달과 별일까? 이러한 질문은 어리석어 보인다. 작가가 <70 GREY MOONS>(2018)를 자신이 소원을 빌던 달을 그린 작품이라고 설명했고, 검은 바탕에 무수한 흰 점을 그려 넣은 작품의 제목을 <우주, 관계의 성좌>(2020)라고 지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달과 별인지를 의심하는 근거는 작가의 2008년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에 있다. 이 작품 속 인물의 눈동자에는 흰 점이 두 개 있다. 이와 같은 흰 점은 보통 검은 눈동자 속 반짝임을 재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런데 자꾸 눈길이 간다. 시선을 붙잡는 이유는 눈동자의 흰 점이 그려지지 않고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잉크로 검은 눈동자를 그릴 때 남겨졌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흰 점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빈 점, 더 나아가 빈 구멍이라고 말해야 한다. 즉 '비어있음'으로 인해 두 개의 흰 점은 눈의 반짝임이라는 재현의 차원을 넘어서 텅 빈 구멍이 된다.

두 개의 구멍은 < YOU TALK ABOUT DAY I'M TALKING ABOUT NIGHT TIME >(2009)을 시작으로 검은 눈동자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눈이 되어 화폭에 등장한다. 특히 2015년에는 텅 빈 눈을 지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형상이 작품 속에 본격적으로 그려졌다. <사각의 숲>, <검은 숲>, <시선> 등에서 두 눈은 < JE VOIS >의 눈동자 속 작은 흰 점처럼 그려지지 않은 채 남겨져 있다. 이러한 '비어있음'이 < JE VOIS >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들 속 눈을 재현에서 벗어난 빈 구멍으로 만든다. 

한 쌍을 이루며 눈이 되었던 두 개의 구멍은 2016년부터 달도 되었다. 그러나 <두 개의 달>(2016), <네 개의 달>(2016), <두 달의 빛>(2017)이라는 작품 제목이 아니었다면, 이전 작품을 기억하는 몇몇 사람은 작품 속 흰 동그라미를 달이 아닌 눈으로 여겼을 것이다. 달인지 눈인지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모호함' 때문에 달을 물감으로 칠했든 아니든 간에 다시 말해 비어있든 채워졌든 상관없이 재현 체계를 벗어나 버린다.

모호함으로 인해 달을 구멍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하더라도, <70 GREY MOONS>의 달까지 재현된 이미지를 넘어 하나의 구멍으로 보고자 하는 시도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 우선 이 작품은 달을 그린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모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름에 살짝 가려지기도 하고 구름 위에서 빛나기도 하는 하얀 동그라미는 얼핏 보아도 달로 보인다. 또한,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그렸다. 작가는 작업 노트에 이렇게 썼다. "일년에 한두 번 달을 보며 소원을 빈다. … 70여 개의 달 사진을 보며 회색 회화에 매우 적합한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촬영한 달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는 작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달을 구멍으로 봐야 하는 이유 역시 작가의 말에 있다. 밝게 빛나는 달의 사진이 회색 회화에 적합하다고 작가가 생각한 순간 달의 이미지는 달이라는 대상에서 떨어져 나와 회색과 결부된다.

작가에게 회색은 "완벽한 흰색과 완벽한 검은색"을 찾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탐구의 대상이자, "명확한 것이 없다"라는 생각의 표현이다. 이러한 회색을 "연습"하는 가운데 그려진 것은 "보름달 주위를 변화무상히 움직이는 구름을 시간순대로 포착하여" 그렸다는 작가의 말처럼 달이 아니라 구름이다. 달은 구름을 그리고 남겨진 부분이다. 그래서 구멍이다.

하나의 구멍이 2019년부터는 작게 여러 개로 나누어진다. < An eye for an eye >(2019), <눈에는 눈>(2019) 등에서 작게 흩어지기 시작한 구멍은 <우주, 관계의 성좌>(2020), <달빛>(2021) 등으로 이어진다. 2020년부터 2021년까지 작품들에서는 주로 둥근 구멍이 십자형 기호와 한 화폭에 동시에 존재하는데, 2022년부터는 둥근 구멍이 사라진 채 십자형 기호만이 화폭을 채우기도 한다. 이처럼 임지현의 작품 속에서 구멍은 하나 또는 다수로 커지고 작아지기를 반복하고 심지어 십자형으로 형태가 변하기도 한다. 따라서 임지현의 작품에서는 눈인지 달인지 별인지를 질문하기보다 눈과 달과 별이 왜 계속 구멍으로 환원하는지 그 이유를 물어야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숨골>(2024)에서 찾을 수 있다.

수많은 서로 다른 색의 십자형 기호 주변으로 파란색이 덮인 <숨골>은 2년 전에 그려진 < BLUE, 150 COLORS >(2022)와 형태, 색채 등이 비슷하다. < BLUE, 150 COLORS >에서 더욱 분명해진, 2019년부터 시작된 색채 탐구의 방향성을 이어가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숨골>에는 커다란 두 개의 구멍이 희미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이 두 구멍은 앞서 설명한 작품들과 달리 비어있지도, 모호하지도 않다.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어 몇 개인지 세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많은 십자형 기호가 두 구멍에도 흩어져 있지만 희미하게 드러난다. 

십자형 기호는 많고, 작으며, 서로 다른 색으로 하나하나 그려지기에 오랜 시간과 굉장한 노동 강도를 요구한다. 작가가 이토록 힘든 과정을 고집하는 이유는 색의 다양성이 세상의 다양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울리지 않는 색은 없다는 자신의 신념을 작품으로 확인시켜 줌으로써 다름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다양한 색의 십자형 기호들 사이를 푸른색이 채우면서 기호는 십자 형태로 남겨진 빈 구멍이 된다. 이 구멍들이 더 짙은 푸른색으로 둘러싸이면서 희미한 두 개의 둥근 구멍이 만들어진다. 작가는 이렇게 생긴 구멍에 숨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숨골은 빗물을 받아들이고 땅속 공기를 밖으로 내뿜는 구멍으로 제주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숨골로 공기를 내뱉는 땅의 호흡이 곶자왈에서는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이 때문에 다양한 생물종이 곶자왈에서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숨골의 역할을 돌아보며 작품에 그려진 대상이 현실의 대상을 지시하지 않고 끊임없이 구멍으로 환원했던 이유를 깨닫는다. 즉 구멍이 다양성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다름이 차별 없이 공존하는 빈 구멍이 임지현의 작품을 보는 모두의 마음에 생기길 바라본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