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트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는 세상의 관계들에 대해 주시하며, 이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선과 점이 쌓이고 확장하는 드로잉 기반의 작업을 거쳐, 검은색과 흰색이 회색의 세계로 연결되는 회화와 입체작업을 아티스트북으로도 출간하며 관계에 대한 생각을 '회색'으로 귀결시키게 되었고, 이는 수많은 색을 펼쳐내는 그림으로 이어지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타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 채 단정해버린 잣대로 행해지는 차별과 혐오, 폭력을 바라보며, 다채로움을 유지하면서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관계성의 방식을 탐구하고 싶어 졌습니다. 텅 빈 눈에서 시작된 구멍이 다양한 존재-색을 엮는 규칙의 단위가 되어 흩뿌려지고, 그 여백 사이로 물감이 캔버스천에 스며들어 번지고 쌓이며 화면을 구성하는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해의 태도에 기다림이 필요하듯 숨기고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빛과 어둠의 조화를 찾으며 명확하지 않은 경계와 차이, 다름을 공존하게 하고 서로를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풍경을 제시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2025년 12월
눈의 빛
2022년 12월 21일 이른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작업실로 가려던 나는 아파트 정원에서 20여분간 사진을 찍고는 다시 집으로 올라가 눈 풍경을 한참 쳐다보고 나서야 다시 집을 나섰다.
왜 유독 그날 그 풍경들이 눈에 밟혔는지, 그 해 여름 이사해 1년을 채 살지 않았던 그 단지의 작은 정원이 좋아 눈 풍경이 더 깊이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그날 바로 사진을 하나 골라 그리기 시작해 몇일만에 빠르게 완성하고 두번째를 그리다 멈추고는 2024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여러 점을 다시 이어 그렸다.
지금 이 그림들의 시간을 상기하다 보니 눈 그리기를 멈췄던 1년 반이 떠오르고 나는 그 시간을 눈으로 – 흰 물감으로 – 덮고 있었나, 하는 생각을 처음 한다.
오일스틱, 연필 등을 사용해 두 점을 그린 후 먹으로 한 점, 이후 동양화 붓을 새로 구입해 먹으로 다시 한 점 이렇게 소품 4점 이후 큰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면서, 왜 사람들은 눈 풍경에 이끌리는지, 나는 왜인지 계속 생각했다.
작업 중 그림을 떨어져서 보다가, 누구나 쉽게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이 있을텐데 그것을 어느 동안 덮어주는 아름다움이 눈 같다고 생각했다.
눈은 언젠가 녹아버리지만 그래서 아름다울 수 있다고.
2024년 여름 눈 그림을 다시 그리며 PAAI가 시작되었고 다소 자연스럽게 산수화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의 시선은 땅에 낮게 자라있는 눈 덮인 풀에서 시작해 눈이 덮이고 있는 나무의 윗부분을 지나 눈이 가득 쌓인 소나무의 잎으로 옮겨가며 근경을 포착해왔다.
이는 선과 점을 오랜동안 주된 요소로 그려온 까닭에서 눈이 쌓인 나무와 풀에서 선이 – 선처럼 보이는 나무가지와 풀들이 – 도드라져 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검은 선과 먹물 위 흰 물감으로 눈을 쌓은 후, 검은 색으로만 그려놓았던 캔버스를 흰색 물감으로 조금씩 덮기 시작했고 그렇게 새로운 추상 작업이 생겨났다.
실경을 참조하여 그린 눈 그림은 다시 추상으로 순환되어 점점이 쌓이던 흰 눈은 흰 색의 엷은 막이 되어 검정 위에 덮이고 스며든다.
숨기고 드러내며, 빛과 어둠의 조화를 찾는다.